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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세진 목사의 행복한 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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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June 20, 2022 반전의 드라마, 에스더
    6월 생명의 삶 말씀묵상이 ‘에스더’서입니다. 에스더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구절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또한 에스 더가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틱한 내용의 전개와 스릴넘치 는 반전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위기가 기회가 되는 일을 보면서 감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에스더서의 이야기가 신자들에게 매력적인 진짜 이유는 그 반전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시는 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나 ‘여호와’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구약이 정경화 과정을 거칠 때 이 에스더서가 과연 정경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찬반이 많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되어진 일들이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비록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책일지라도 다른 어느 책보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섭리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책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신학자는 에스더서의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과 생각지도 않은 장애물들과 해결되지 않는 일들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십니까? 왜 내게는 안 보이시는 것입니까?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이런 우리의 한탄은 더 클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삶의 역경속에서 뒷짐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전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그래서 망한 것 같은데, 이제는 더 이상 재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바로 그 때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그 시간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 혹여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지난 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텅 빈자가 되었습니까? 우리 주님은 반전의 드라마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다 끝난 것 같은 내 인생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그런 방법으로 다시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 다 안 된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도 우리 주님은 당신의 뜻과 방식대로 반전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 번 한주도 우리의 삶과 우리교회를 반전의 드라마로 만드실 주님을 기대하는 한 주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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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June 13, 2022 신앙도 믿음도 듣고 배워야 자랍니다
    서울 온누리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고(故) 하용조 목사님께서 온누리교회를 개척하면서 모든 교인들에게 일대일제 자양육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세운슬로건이 있었는데, ‘배우든지 가르치든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슬로건에서 볼 수 있듯이 고 하용조 목사님과 온누리교회의 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초년시절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교인들을 가르치는 사역에 조금은 등한시하였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 중반의 젊은 나이에 한인 인구 3,000여명 체 안 되는 지역에서 가장 늦게 시작한 개척교회로써 매 주일 모여 예배하는 것만도 벅찬 시간을 보내던 시기였습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 땅의 전형적인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었기에 매 주일 빠지지 않고 예배당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그런 교회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교인들과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과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큰 교회에서나 할 법한 사치에 불과했습니다. 교인들의 거주지가 평균 20마일 넘는 곳에서 교회를 다닌다거나 연세가 팔십이 훌쩍 넘은 분들이 교인의 반 이상인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것도 일대일양육을 한다는 것은 가능치 않는 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목회의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30대 푸른 청춘을 다 쏟아부은 교회를 후임목사님께 부탁하고 올 때 간절한 바람과 기도가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으로 양육하지 못한 교인들을 후임목사님께서 잘 양육해주셔서 그 교회가 교회로써 반듯하게 서기를 말입니다.   이민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이 가지는 잘못된 생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이민교회 안에 일어나는 문제들과 갈등들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많은 목회자들이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은퇴할 시기가 되었다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런 반복적인 실수(?)를 하지 않고자 부단한 관심과 연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은 모세오경 중 신명기 말씀을 통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신명기 말씀 속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듣고 배우고 행하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신명기를 통독하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민교회의 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면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그냥 교회만 다니면 자동적으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도 듣고 배울 때만 성장합니다.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미숙성한 교인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가르침과 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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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June 06, 2022 90일 성경통독 이제 시작하십시오.
    아마 주보를 받아들고선 목회칼럼 첫 번째 타이틀, ‘90일 성경통독을 이제 시작하십시오’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머리가 아파오시는 분이나, ‘올 것이 온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2021년 9월 12(주)부터 시작된 90일 성경통독이 다음 주 화요일(6/14)이면 3독이 끝납니다. 아마도 작년부터 충실히 90일 성경읽기를 따라 오신 분들은 벌써 성경을 3독 하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4독 째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통독을 어려워하십니다. 하지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90일이면 충분히 1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하루에 10장 가까이 읽는 것이 쉽지 않다고, 바쁜 데 성경읽을 시간이 어디있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아닙니다. 하루 10장 읽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낄 뿐입니다. 지난 4월 셋째 주, 우리는 시편 150편을 6일만에 통독을 해 보았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루에 길어도 1시간만 투자하면 90일이면 성경 1독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를 여러분과 나눈다면 제가 목회하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 모두가 성경 100독을 하는 꿈입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교인 모두가 성경 100독을 인생의 목표로 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 100독이 어려울 것 같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2022년부터 4독을 하시게 된다면 10년이면 40독입니다. 그리고 20년이면 80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5년이면 드디어 100독을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부터 우리가 25년간 무탈하게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100독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통독 100독을 하는데 25년까지 안 걸립니다. 처음 30독까지가 5-6년 정도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부터는 하루에 한 시간에 50장씩 읽어내려가는 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2032년도가 되면 우리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성경 100독을 달성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 목회칼럼을 읽으시는 분들은 너무 황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절대 황당한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저와 함께 90일 통독시작해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90일 성경통독을 하실 수 있도록 조금 도움을 드릴까 생각도 합니다. 7월달부터 매달 마지막 주는 아침경건회를 성경통독하는 주간으로 지킬까 합니다. 지난 번 고난주간 시편 통독을 했듯이 7월 마지막 주부터 매달 마지막 주는 온 교우들이 함께 아래에 나와 있는 일정표대로 성경을 통독하면서 가다보면 어느 순간 여러분들도 혼자서 90일 통독을 완주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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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31, 2022 민주당의 협의 없는 차별금지법 공청회 단독의결
    민주당의 협의 없는 차별금지법 공청회 단독의결되었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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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31, 2022 누군가 널 위하여
    지난 주부터 2주간 교회방역을 위해 또한 감기환자 확산을 막기 위해 전교인 격리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의 모든 예배를 2주간 온라인으로 돌리고 각 가정별로 공예배와 아침경건회 말씀을 묵상토록 하였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지난 2여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전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삶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지난 시간을 지나오면서 우리들은 나름대로도 이 펜대믹을 대처하는 방식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코로나라는 이 신종병에 유연하게 대처하게 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지난 주부터 이른 아침 시간에 텅빈 예배당에서 혼자 찬송하고 성경봉독과 아무도 없는 빈 자리를 바라보며 아침경건회 말씀을 전할 때,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도 간간이 들곤 했습니다. 비록 많은 분들은 아닐 지라도 늘 이른 아침 그 시각 그 자리를 지켜주셨던 분들로 인해 외롭지 않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기도회 후 함께 나누던 커피 한 잔이 참 좋았었는데 말입니다. 텅빈 예배당에 홀로 말씀을 녹음하고 카톡방에 올리는 것이 아직은 조금 낯설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날 것이라 빨리 익숙해져야 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혼자 예배당에 앉아서 소리도 질러보고 조용히 기다림의 시간도 가져보고 교우들 한 분 한 분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다 보니 어느 새 한 시간의 시간도 금방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말입니다. 처음 기도를 시작할 때는 홀로 앉아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텅 빈 예배당이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혼자만의 느낌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내가 앉은 이곳에 함께 하는 이들은 없을지라도 지금 각자의 처소에서 함께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혼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함께 기도하고 있음에 위로와 격려를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교회 내에 환우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습니다. 왠지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교우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아닌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혹여 우리 주님께서 제가 또 속도조절하지 못하고 빼 달리려 하니 제동을 거시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집사님의 문자가 저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이 저희 교회에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 말씀이 저를 다시 세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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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25, 2022 반지성주의(反知性主意)인가 무지(無知)함인가
    얼마 전 한국의 20대 대통령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이 있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반지성주의’란 아마도 ‘지성주의’의 반대되는 뜻으로 말하여진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성’이라고 함은 배운 이들의 생각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움이란 이 땅의 이치를 깨닫는 것, 즉 사물의 이치이자 현상의 옳고 그름을 바르게 분별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성인’이라는 말은 사물과 현상의 옳고 그름을 나름대로 바르게 판단하고 해석하는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인류 사회는 오래전부터 교육(敎育)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인들이 사회를 다스려야 사회가 안정되고 평안해질 수 있다는 인류 보편적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기인한 마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배움이 많고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여 교육의 수준이 높다할지라도 바른 배움이 없다면 이것은 아니 배움만 못한 것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지성’에다 ‘반(反)’자를 붙이게 되면 배우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 배움대로 하지 않는 악행을 일컫는 말이 되어 버립니다. 한편, ‘반지성주의’라는 말과 다를 바는 없지만 의미상 차이가 있는 단어가 또 있습니다. ‘무지’라는 말입니다. ‘무지’라는 말은 한자말 그대로 지식이 없음을 뜻합니다. 문제는 이 ‘무지’라는 단어 역시도 긍정적인 뉘앙스보다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집니다. 사람들이 모든 지식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특정한 분야에 있어서는 무지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무지’라는 말을 우리가 쓸 데에는 분명 무슨 의미를 전제로 깔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즉,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알지 못함을 꼬집는 말이지만, 왠지 의도적으로 알지 않으려 하는 것을 질타하는 듯한 뉘앙스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반지성주의’와 ‘무지’함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 뿐 말씀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삶이 없는 이들입니다. 또한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자신은 성경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신자들을 봅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문제는 바로 이런 수준의 반지성주의와 무지가 일으키는 문제들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지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무턱대고 예수를 믿겠다고 덤벼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무지함’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의 반지성주의와 무지함이 사라질 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든든한 영적 충만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같이 배움의 겸손한 자세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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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19, 2022 소프트웨어(Software)인가, 하드웨어(Hardware)인가
    컴퓨터 용어가운데, 소프트웨와 하드웨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컴퓨터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사실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정확한 설명이 되지 못하겠지만, 제 개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설명을 드린다면 하드웨어란 집을 예를 들어, 새로 지은 집과 가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프트웨어란 그 새 집 안에 가구들을 어떻게 배치를 하고, 특히 집안의 조명의 밝기를 어떻게 하며 전구의 색깔은 어떤 색으로 할지를 생각하고 구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선교를 다니면서 수도없는 고민에 빠져 본 적이 있었습니다. 남미의 나라들과 몽골, 동유럽등을 관찰하면서 어마무시할 정도의 선교자금을 붓는 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매우 미미함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뛰어난 전략으로 선진 선교를 한다하더라도 선교대상 국가의 나라 기반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니,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이 왜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 시설과 같은 국가 기반사업을 구축하려 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즉 한 나라의 발전도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를 활용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하드웨어의 구축이 없으면 그 소프트웨어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 왜 이민 사회의 한인교회 교인들이 잘못된 신앙과 우상숭배에 가까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들은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신자로서의 신앙성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지 고민해 왔었습니다. 이들 가운데서는 교회에서 내놓으라는 좋은 프로그램을 다 섭력하였으며, 전도와 구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에도 충실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신앙성숙은 없고, 종교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셨습니다.   이런 분들을 상담하면서 점차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교회를 오래전부터 다녔지만,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둘째치더라도 기본적인 교리와 신학에 대한 이해는 아예 백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하드웨어같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하고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봉사한다할지라도, 성경이 무엇인지,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 믿음이란 무엇인지 등등 이 모든 기초적인 교리와 신학의 이해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언컨대 그건 우상숭배일뿐입니다. 바른 신앙은 내가 믿는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모쪼록 신앙의 하드웨어를 더 단단히 구축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뉴저지참소망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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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09, 2022 뉴저지참소망교회 찬양대 찬양(05-08-2022):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05-08-2022 주일 찬양대 찬양입니다. 곡: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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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09, 2022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
    어릴 적 살던 집은 여느 집과 다름없는 시골 골목길을 한참을 지나야 볼 수 있던 언덕 집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여 전의 일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전자기계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과 놀이하던 것은 딱지치기, 다방구(구슬치기), 땅따먹기 등등, 넓은 공터에서 흙냄새를 맡아가며 놀던 것이 전부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때는 한 번, 밖에 나가면 땅거미가 지고 저녁 늦게나 돼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늘 그럴 때면 늦은 시간 어머니의 잔소리가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발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 내내 어머니께 야단맞을 생각이 걱정되기보다 항상 지나야 하는 골목길이 저에게는 더 걱정거리였습니다. 100m남짓 되는 골목길을 어둑어둑해진 시간, 혼자 걸어 갈 때면 제 머리 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다 들곤 했습니다. 혹여 며칠 전 이웃 동네에 나타난 귀신이 우리 동네에도 나타나 나를 잡아 먹지나 않을까, 왜 어제 저녁 엄마랑 전설의 고향을 봐서, 이불 속에서 봤던 구미오의 눈이 자꾸 생각나 혹여 나의 간을 빼먹고자 뒤에서 덤비지나 않을는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어둑해진 골목길을 지나곤 했습니다. 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이랑 노는 데 정신을 팔리다보니 또 해가 지고 어둑해진 뒤에서야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늘 가슴졸이게 하는 그 골목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졸이며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평소에는 누구도 저의 뒤를 따라 온 적이 없었는데, 그 날만큼은 누군가가 나의 뒤를 따라 오고 있다는 인기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찰라, 누군가가 제 목덜미를 잡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마냥 두려움에 잔뜩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울음을 터뜨린 저를 아버지는 잠시 안고 있으시다가 다시 아무말 없이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 날 그 골목길은 더 이상 두려움과 무서움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힘쎈 나의 영웅, 나의 슈퍼맨, 아버지와 함께 걸은 골목길이었기에 조금의 두려움도 무서움도 없었습니다. 오직 기쁨과 평안뿐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길에서 두렵고 떨림의 골목길을 걷고 계십니까? 당신의 뒤에서 당신의 걸음을 지켜보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걷는 지금 그 길은 걱정과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의 길입니다. 오늘은 천국에 계실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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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02, 2022 뉴저지참소망교회 찬양대 찬양(05-01-2022)
    05-01-2022 주일 찬양대 찬양입니다. 곡: "내 영혼에 그윽히 깊은 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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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May 02, 2022 온도차
    일상생활에서 대화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말이 불러온 오해로 나라와 나라의 전쟁을 일으킨 사례가 역사 속에서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내가 아 하고 말했는데, 상대방은 어 하고 알아들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늘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 듣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사람이란 그 사는 지역, 그 지역의 문화배경, 성장과정에서 쓰여진 단어와 뜻이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대화가운데 원치 않는 오해와 반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이지만 또한 ‘언어의 온도차’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차이로 인해 불편함을 언어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온도차’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온도의 높낮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인간이 온도차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체온 즉 섭씨로 36.5보다 높거나 낮을 경우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 정도는 다 아시는 것이라 특별히 자세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신체적 온도차를 이야기하는 이 말이 언어에 붙어서 서로간의 대화 속에서 온도차를 느끼게 한다고 할 때는 무엇인가 서로 불편한 이견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같은 의견과 문제를 가지고도 서로 다른 이견 즉 온도차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요?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원낙 다양한 온도차를 이야기할 수 있기에 꼭 이것이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목회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물론 이게 꼭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전제로 말씀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논의나 대화를 할 때 어떤 문제와 의견을 가지고 온도차를 보이는 대부분의 이유가 서로에 대한 신뢰성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음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에게도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여러분들은 대화의 온도차를 느끼십니까? 가정에서 부부와의 대화, 혹은 부모와의 대화, 또한 자녀와의 대화에서 온도차를 느끼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그냥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과 긴장(Tension)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직까지는 우리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미묘한 온도차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온도차를 줄여가며 같은 체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교회의 방향과 사명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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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April 25, 2022 뉴저지참소망교회 찬양대 찬양(04 24 2022)
    4월 24일 주일 찬양대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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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April 25, 2022 가끔 길을 잃을 때
    선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육체적(?)이라 해야 할지 제 개인적으로 병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지만, 한 가지 고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본능적으로 제가 보는 앞쪽을 무조건 북쪽으로 생각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지도 혹은 오늘날과 같이 네이게이션이 없으면 길을 찾는데 매우 어려움을 느낍니다. 여기 뉴저지로 온지도 벌써 8개월이 거진 다 지나고 있습니다. 8개월 정도면 어느 정도 동서남북이 분간이 될 만도 한데, 여전히 아침경건회를 위해 이른 새벽, 차를 몰고 나올 때마다, 혹은 Lakeland쪽으로 내려갈 때는 무의식적으로 북쪽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생각해 봐도 어떻게 20대 젊은 시절을 직업군인으로 살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 가장 어려웠던 과목이 있었습니다. 당연 ‘독도법’(지도와 나침을 이용하여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교육)이었습니다. 독도법 수업을 받는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의 마지막 과정인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2인 1조가 되어서 동료와 함께 6시간 내로 걸어서 목표지점에 도착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예행연습을 하는 시간 내내 한 번도 길을 잃어버리거나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방향감각이 덜 발달되어 있는 대신 지형지물 분석력이 남들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기보다 사실은 독도법이라는 수업을 받으며 ‘나침반’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나침반의 특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나침반은 저와 비슷한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놈은 무조건 어디에 가져다 놔도 북쪽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저와 나침반은 공통적으로 북쪽을 바라보고 생각하는데, 정작 저는 길을 잃는 경우가 있지만, 나침반은 언제나 정확한 북쪽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제가 보고 있는 앞쪽이 마치, 누가 뭐라 그래도, 북쪽인 것 같아도 어김없이 방향지시계를 쳐다보면 북쪽이 아닐 때가 많음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기억을 상기해 봅니다. 내 생각과 내 마음이 꼭 바른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정북을 늘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과연 내 삶의 정북을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말입니다. 혹여 여러분 가운데서도 지금 길을 잃어버리시거나 어느 쪽이 북쪽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 분이 있으십니까? 우리 인생의 나침반인 ‘성경’을 펼쳐보시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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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April 19, 2022 2022 부활주일 찬양대 찬양(4-17-2022)
    부활주일 찬양대 찬양(4-17-2022) 뉴저지참소망교회 찬양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최고의 분께 최고의 것으로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찬양대가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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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참소망교회April 18, 2022 예수의 부활, 역사적 사실인가?
    2017년 개봉된 기독교 영화가 있습니다.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입니다. 2006년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나오고 난 뒤 거진 10여년이 지난 뒤 나오게 된 기독교 영화입니다. 2006년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상영될 당시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서 상연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등, 기독교내에 적잖은 파장과 반발이 있었습니다. 거진 2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기독교 내에 절대적인 가치와 중심내용으로 존재해 오던 것들이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빈치 코드’를 시작으로 ‘유다복음’ 등등, 한 번도 일반사회로부터 기독교 교리와 사상이 도전받아보지 않았던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기독교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특히 그의 부활의 역사를 증명하는 기독서적들이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기가 늦었음을 직감해야 했습니다. 2000년 초반만 하더라고 ‘긍정의 힘’과 ‘신비주의’, ‘은사주의’와 같은 기복주의적 번영신학에 빠져 더 이상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닌, 이상한 변종 기독교가 되어 세상을 향해 냉철한 이성과 지성, 그리고 탁월한 영성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그 부활의 사실을 말하기에는 세상이 이미 관심을 잊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흐른 2017년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가 조금씩 우리가 잊고 있던 기독교의 참된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을 신자들로 하여금 다시 갖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2002년 ‘예수 사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출간된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리 스트로벨 목사(시카고 트리뷴지의 법률 당당 기자였음)는 자신이 기사생활을 하던 시절 예수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고자 시작했던 그의 여정이 결국 예수가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부활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들이 넘쳐남을 깨달아 알게 된 뒤, 결국 무신론자였던 자신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무릎 꿇고 유신론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한물간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으로 인해 변질되어 이상한 변종 종교로 전락시켜 버렸으며 근본없는 복음주의 영향으로 동양철학과 명상을 혼합한 인문학적 큐티운동으로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함으로 교인들의 신앙을 철저한 교리와 신학에 근간하여 바른 믿음으로 양육한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와 다를 바 없는 변종 기독교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지켜온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그리스도론)은 물론, 종교개혁으로 인해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증거했던 ‘이신칭의’ 교리까지 말살시켜 버렸습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며 다시 우리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창했던 참된 개혁주의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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